3. 또 다른 시작
민준의 출근길은 서연과의 만남 이후로 완전히 달라졌다. 그는 여전히 매일 같은 길을 걷고 같은 지하철에 몸을 싣지만, 마음 한 구석에서는 ‘혹시나’ 하는 기대감에 두근거렸다. 출근길에 서연을 생각하는 것이 이제 그의 일상에서 가장 큰 부분을 차지하게 되었다. 어느새 그는 습관적으로 주변을 둘러보게 되었고, 항상 바쁜 일상에 잠긴 주위 사람들과는 달리 자신만은 뭔가 다른 사람처럼 느껴졌다.
“민준씨 그거 들었어? 이제 플라스틱 빨대 사용 금지된대”
출근길에 마주친 동료 상현이 말했다. 상현은 아침부터 커피를 들고 출근하는 습관이 있다.
“빨대없이 어떻게 마셔요? 그냥 컵에 입 대고 마셔야 하나요?” 민준이 물었다.
“종이빨대. 빨리 물러지긴 하지만, 그래도 입 대고 마시는 것보다 낫지”
광고1팀 박상현 과장. 민준의 대학 선배로, 종종 마주칠 때마다 민준에게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곤 했다.
“그러고보니, 민준씨 고등학교때 그림 좀 그렸다고 하지 않았어? 이번에 환경문제로 프로젝트를 하나 진행할 건데 민준씨가 좀 도와줬으면 해”
최근 환경 관련 이슈로 새로운 광고 캠페인을 진행한다는 소식을 들었었다. 십년도 더 전에 잠깐 그려본 그림실력으로 광고 프로젝트를 맡는다는 건 어색했지만, 박과장의 부탁을 거절하기 어려웠다.
“일손이 부족해서 그래. 직접 광고를 제작하라는 게 아니니, 광고대행사랑 같이 컨설팅 좀 해줘~”
민준은 사무실로 올라가 인사를 하고 자리에 앉아 업무 준비를 했다.
모니터 화면에 김부장 호출이 떠있다.
“부장님, 부르셨습니까?”
“민준, 환경 캠페인 하나 맡아볼래?”
이것이 바로 출근길에 박과장이 언급한 프로젝트였다. 상부에서 이미 결정된 사안이었다.
“지금 진행하는 사업은 기한이 연장되었고 환경 캠페인은 박과장 서포트니까 부담갖지 말고”
민준은 거절할 수 없는 명령을 받은 것 같았다. 그는 자신이 최근 업무에 집중하지 못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점심시간, 민준과 박과장은 프로젝트에 함께 참여하는 이수진 대리와 함께 식당에 앉아 있었다. 테이블 위에는 따끈한 국물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김치찌개와 밥그릇이 놓여 있었다. 이수진 대리는 프로젝트에 대한 설명을 시작했다.
“광고대행사는 유앤 스튜디오로 섭외했어요. 미팅은 모레로 잡혔고, 우리도 미리 자료조사를 좀 해둬야 할 것 같아요.”
유앤 스튜디오는 업계에서 손꼽히는 1위 대행사였다. 김철 대표는 미국 유학을 마치고 귀국한 후 20대에 창업하여 광고계의 새로운 별로 떠올랐다. 회사가 이번 프로젝트에 상당한 투자를 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민준은 내심 기대감을 갖기 시작했다. 이수진 대리는 김철 대표를 만날 생각에 벌써부터 들뜬 모습이었다.
“김 대표는 정말 똑똑하고, 거기다가 잘생겼다고 하더라고요~”
그녀의 말에 박과장과 민준은 그녀를 바라보며 미소 지었다. 박과장이 농담을 던졌다.
“잘 해봐, 이 대리. 이번 기회에 남자친구도 만들어보라고.”
민준도 그 말에 웃음을 터뜨리며 말했다.
“그래요, 이 대리. 김 대표와 잘 되면 좋겠네요.”
이수진 대리는 그런 두 사람의 말에 쑥스러운 듯 얼굴을 붉히며 웃었다.
그들은 각자의 역할에 충실하며 미팅 준비에 몰두했다. 민준은 컴퓨터 화면에 펼쳐진 환경 캠페인과 관련된 통계와 사례들을 꼼꼼하게 검토하며 자료를 정리했다. 그의 손가락은 키보드 위를 빠르게 움직였고, 화면 속의 숫자와 그래프들은 점점 완성도를 더해갔다. 한편, 이수진 대리는 그녀의 노트북에 각종 창의적인 광고 아이디어를 준비했다. 그녀의 눈빛은 광고에 살아 숨 쉬는 이야기를 담기 위해 반짝였다. 박상현 과장은 프로젝트의 세부 사항을 면밀히 점검하며 전체적인 흐름을 파악했다.
미팅 날, 그들은 기대와 긴장감을 안고 유앤 스튜디오로 향했다. 화려한 건물 로비를 지나자, 광고계의 천재로 불리는 김철 대표가 따뜻한 미소와 함께 그들을 맞이했다. 김 대표는 자신의 팀, 크리에이티브 디렉터 한서진, 기획팀장 이준호, 그리고 디지털 마케터 최윤아를 소개했다. 그들은 각각의 분야에서 독보적인 실력을 가진 인사들이었다. 박과장은 마찬가지로 민준과 수진을 그들에게 소개하며 자랑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미팅은 예상보다 길어졌다. 환경 캠페인의 핵심은 단순히 플라스틱 빨대 사용의 감소와 종이빨대 사용의 증가에만 있지 않았다. 플라스틱 빨대 사용 금지와 관련된 법안은 민감한 문제였으며, 이로 인한 캠페인 진행에 있어 부담스러운 측면이 있었다. 또한 종이빨대에 대해서도 환경적 이점에 대한 평가가 엇갈려, 목표 설정에 있어 다양한 의견이 오갔다.
첫 미팅이 끝나고 첫 회식의 밤, 프로젝트 시작을 기념하는 일곱 명의 팀원들이 모여 술에 취해 이야기를 나눈다. 가볍고 즐거운 분위기 속에서 김철과 박상현이 이성 문제에 대한 이야기를 주도했다. 김철은 유쾌한 태도로 말을 이어갔다.
“사랑이라는 건 참 신기하죠. 언제 어디서, 누구와 불꽃이 튈지 모르니까요!”
그의 말에 회식 자리가 웃음으로 가득찼다. 박상현은 그런 김철을 향해 장난스럽게 말했다.
“김 대표님은 사랑 전문가이신 모양이네요, 하하!”
이수진 대리가 궁금증을 드러내며 물었다.
“그러면 김대표님은 어떤 스타일을 좋아하세요?”
김철은 맥주를 홀짝이며 답했다.
“사랑이라.. 진짜 사랑은 자유롭고, 예측할 수 없어야 해요. 너무 많은 규칙에 얽매이지 않는 게중요해요.”
이수진은 그의 대답에 귀를 기울이며 조심스레 물었다.
“그럼 대표님은 지금 사랑을 하고 계신가요?”
김철은 미소지으며 대답했다.
“사랑은 항상 제 주변에 있죠. 하지만 저는 자유로운 영혼이랍니다, 이수진 대리님.”
박상현은 그의 대답에 웃으며 김철이 바람둥이라고 농담을 던졌다. 한서진, 이준호, 최윤아도 상현의 말에 공감하며 웃었다. 이수진은 샐쭉한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그렇군요. 사랑에 대한 김철 대표님의 생각, 잘 알겠습니다.”
분위기는 여전히 활기찼지만, 이수진은 김철에 대한 약간의 실망감과 동시에 묘한 매력을 느꼈다.
띠리리링- 띠리리링-
갑자기 김철의 전화가 울렸고, 그는 전화를 받기 위해 자리를 비웠다가 돌아와 말했다.
“오늘은 정말 즐거웠습니다. 하지만 급한 일이 생겨서 이만 먼저 가봐야겠네요. 여러분도 즐겁게 시간 보내시고, 조심히 들어가세요.”
박과장이 대답했다.
“그럼 저희도 이제 일어나야겠네요. 내일도 출근해야 하니까요. 오늘 모두 수고 많으셨습니다.”
그렇게 프로젝트의 첫날은 성공적으로 마무리되었고, 팀원들은 새로운 시작을 축하하며 마무리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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